어제, 그러니까 아빠의 생신이 하루 지난 토요일 저녁에 친정집에 모여 아빠 생일파티를 했다.
금요일 점심에 아빠 술약속이 있으시기도 했고 평일이라 식구들 움직이기 그럴까봐 토욜에 하자고 하셨단다.
단촐한 식사에 조금은 부실한 선물에.. 그래도 카드는 마음을 가득 담아 썼으니 아빠가 좋아하셨길 바라면서..

아빠는 연세가 드시면서 젊을 때의 날카롭게 바려져서 예리하고 집요한, 열정적이면서도 냉철했던 지성보다도
오히려 감성적이 되시고, 더 부드러워지시고, 옳은 말씀보단 우리의 마음을 울리는 이야기를 더 자주하신다.
예전에 무니쌤이 남자든 여자든 나이가 들면 중성적이 되는 것 같다고 하셨는데, 우리 아빠에게서도 그런 변화가 조금씩 생기는 것 같은 느낌이 난다.

나는 아빠의 젊을 적 모습을 알고 있기에 지금 보이는 아빠 모습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
지금은 때로 허술해보이기도 하고 때론 아이같아 보이고 몹시 유머러스하고 가끔은 서운해하시기도 하지만
그리고 시간이 더 지나서 재아가 무언가를 생각하고 느낄 때 쯤에의 우리 아빠는 - 아니 재아 외할아버지는 -
더더욱 허술하고 때론 실없고 때론 유치하기도 하고 느릿느릿하면서 젊은 애들의 말을 잘 이해못하기도 하는
그런 진짜 할아버지가 되어 계시겠지만 그게 아빠가 손주에게 기억되고 싶은 모습의 전부는 아닐지도 모른다.

나는.. 나의 노년에.. 내가 비록 노인의 아름다움 뿐 아니라 노인의 아쉬움도 고스란히 지닌 사람이 되었다해도..
누군가가 나에게도 '젊음'이 있었고 '열정적으로 살았던 순간'이 있었고 '온 힘을 다해 사랑했던 순간'이 있었음을 기억해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냥 지금의 늙은이가 아니라, 지나온 세월을 열심히 걸어온 뒤에 얻은 노쇠한 몸과 무뎌진 지성과 유치한 감정의 허울을 쓰고 있지만, 나는 처음부터 그렇게 태어난 것이 아니라는 것, 시대는 달라도 너희들과 비슷한 젊음의 몸과 마음을 지녔던 나의 과거를 통해서라도 너희들과 소통하고 싶다는 것을 말하고 싶을 것이다..

그래서 더욱.. 지금의 기록을 더욱 남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의 아이들이 나를 개념없는 늙은이 취급할 때, 나의 손주들이 나를 아무것도 모르는 무식쟁이로 생각할 때, 아가들아, 내가 세월의 강을 거슬러 올라 너희들과 같이 될 수는 없지만.. 나도 너희들과 '함께' 하고 싶을 때가 참 많다는 것을.. 한 때는ㅡ너희들이 태어나기 전이거나 너희들이 뽈뽈거리며 기어다닐 때이거나 너희들이 코흘리며 학교 다닐 때ㅡ 나도 나의 시대에서 너희들과 비슷한 성질의 고민을 하고 비슷한 아픔을 겪었고 그래서 너희들의 인생을 나는 허투루 쉽게 생각하지 않는만큼.. 너희도 아직은 맞이하지 않았으나 언젠가 너희들이 세월의 강을 따라 내가 서 있는 지점까지 흘러내려온다면 네가 지나온 시간들을 누군가가 무시하거나 쉽게 생각하지 않기를 바랄것이라는 것을.. 기억해주길 바래... 라고 말하고 싶어서 별 것 아닌 나의 인생이라지만, 나의 마음을 담아, 미래에 만날 젊은이들에 대한 설레임을 담아, 이 곳에서 저 곳에서 조금씩 조금씩 이야기하고 조금씩 조금씩 흔적을 남기며 살게 될 것 같다.

생일은 아빠가 맞이하셨는데 내가 생각이 너무 길었다. :-)
나는 나이가 아주 많이 들면 젊은 사람들 사이에서 주거니 받거니 하며 많이 이야기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옛날엔 이랬단다, 하면서 재미있는 이야기도 많이 해주고
쪼글쪼글한 귀로 그 아이들의 이야기도 귀기울여 많이 듣고싶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연애'라는 것이 시작되기 한참 전에 미래의 남편이 찍어준 사진..
봄꽃이모의 그늘 아래 모인 베짱이, 산, 토깽이가
2005년 늦은 가을 강릉으로 백수여행을 갔더랬다.


'엄마의 일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엄마는 누가뭐래도 너희들이 최고야  (1) 2012.04.30
컨디션 제로  (0) 2010.10.08
산언니가 놀러왔다  (2) 2010.06.30
수영을 배운다  (2) 2010.03.08
2009년 10월.. 주보글  (1) 2009.10.16
by 나니아인 2010. 1. 10. 04:14